누가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역사에 통시적 안목을 지닌 역사가이자,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의미를 변증 하는 신학자이며, 역사를 서사로 풀어내는 문학가이기도 하다. 그는 일관된 시각으로 하나님의 구원 서사를 설득력 있게 기술한다.

1. 하나님 나라
누가의 관심은 예수로 시작된 '구원' 그 자체다. 그가 기술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틀을 말하자면, '옛 시대'와 '새 시대'다. 예수는 새 시대를 가져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며, 교회는 그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새 이스라엘'이다. 곧 누가가 그리는 예수의 사역은 새 이스라엘 창조하시는 메시아이 사역이다. 따라서 누가의 가장 큰 심장은 '예수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아들 예수를 통해 성취하시면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 이야기다. 1) 이스라엘과 열방을 돌보심. 누가복음을 여는 출생서사는 하나님이 마침내 이스라엘을 돌보심으로 이스라엘과 온 열방을 향한 회복을 시작하셨다는 선포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1:32)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이며, 열방의 빛이 될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부르신다(15:1-32), 잃어버렸던"아브라함의 딸"(13:16)과 "아브라함의 자손"(19:9)이 찾은 바 될 것이다. 누가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19:10) 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 사역은 장차 교회를 통해 온 열방으로 확대될 것이다.(9:1,2: 10:1,2; 24:47) 2) 옛 시대와 새 시대. 누가는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를 '시대'적 관점에서 확실하게 구별한다. 옛 시대를 마감하는 요한과 새 시대를 여시는 예수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그런 구분을 시도하지만 누가는 서사적 장치를 통해 두 시대를 연결하면서도 포개지 않는다. 예수의 사역과 요한의 참수 전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겹칠 ㄸ도 누가는 서사 기법을 동원해 그것을 분리한다. 즉 서사 무대에 요한과 예수를 함께 두지 않는 기법이다. 요단강 세례시 두 사람을 동시에 비추지 않고 심지어 예수의 세례 기사 전에 요한이 옥에 갇힌 사실을 언급한다(3:20). 3)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누가복음은 종말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그린다. 예수가 서 계신 그 자리 그 시간, 즉 그의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실재하고 구현된다. 치유를 통한 새 질서를 맛보고 귀신이 항복함으로 새 통치를 경험한다. 70인의 제자들도 그 나라를 현재성으로 맛본다. 치유와 죄 용서의 현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히 베풀어지는 자리다.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자들과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이 한 자리에서 생명의 풍요를 맛본다(5:30-32; 7:34-,39; 15:1,27-10; 18:10-13; 19:2) 이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누가는 구원의 현재성, 곧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의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오늘'과 '이제'를 자주 사용하는데 '오늘'은 완성이라는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
2. 예수의 정체성
누가가 증언하는 예수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분이다.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적 특징은 다양한 칭호를 동반한다. 1) 다윗적 왕. 출생서사에서 누가는 예수를 다윗과 연결한다.(1:27,32,69; 2:4,11). 옛 언약을 성취하는 메시아가 다윗의 집에서 출생한다(삼상 7장). 그는 다윗의 왕위를 받아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왕이다(1:32,33). 이스라엘을 속량하고 돌보는 구원의 뿔로(1:69; 시 132:17), 그는 치유와 회복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는 왕으로서 '구주'(2:11)가 된다.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하는 잃어버린 자들이다(19:10). 왕의 통치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수혜로 나타난다(4:14; 5:17; 6:19;8:46; 9:1).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은 기나긴 여정을 동반한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긴 여행서사는 왕의 여정을 다룬다(9:51-19:27). 왕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19::38)하여 더러워진 성전을 정결하게 하며 통치권을 회복한다. 2) 하나님의 아들, 주, 그리스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1:35). 그 관계성은 예수의 자기증언(2:49)과 하나님과 성령의 증언(3:22)으로 분명하게 설정된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정체성은 세례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광야 마귀의 시험과 귀신들의 외침을 통해 확증된다.(4:1-13,41; 8:28).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아들'에 가두어 이해했지만,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동등한 권위와 능력의 차원으로 확장하시며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신다(20:41-44). 만유를 다스리는 위대한 통치자이며, 동시에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한 '주'다. 예수의 '주' 되심은 그의 고난, 죽음, 부활을 통해 시행되고 마침내 승천을 통해 완성된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는 '주' 이시다(20:43; 22:69). '그리스도'는 누가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예수의 정체성이다. 출생서사에서 천사의 입술로 처음 언급된 '그리스도'(2:11)는 구원을 가져오는 왕으로 나타난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22:67))는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고난과 죽음으로 답하신다. 메시아에게 고난은 숙명이었다(24:26,46).
3) 선지자. 종. 인자 예수는 고향에서 적대받고 예루살렘 안에서 죽는 선지자들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는 종말론적 '선지자'다 (4:24;13:33).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선지자적 이미지는 그가 보냄을 받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심판과 종말을 선언한다는 차원에서 뚜렷해진다. '고난'이라는 주제는 예수의 '종'과 '인자'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예수는 무고히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다(22:20; 사 53:11,12). '인자'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용서를 베풀고(5:24). 안식일의 주인이시며((36:5), 잃은 자를 찾고(15장;19:10), 마지막 때 심판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12:35-48; 17:20-37; 21:5-36). 더 나아가 통치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을"(22:69). 자이기도 하다. 인자가 세상 폭력과 사망권세를 무력화시켜 자신의 통치 아래 온전히 두는 방식은 모순적이게도 '고난'이다. 예수는 자신의 고난을 세 차례 예고하신다(9:22,44; 15:31). 예루살렘 여정은 왕의 행진이면서 동시에 고난 받는 종의 길이기도 하다.
3. 제자도
1)부르심과 보내심 예수가 제자를 부르시는 첫 장면은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면서 시작된다. 베드로의 인생에 배에 오르신 예수가 자신의 배에 오르도록 그를 초청하신 것이다. 예수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와 동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 제자도의 모범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예수의 배에 올라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취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제자로 부름 받는 조건은 빠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죄인이 부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5:32).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맛본다(6:1). 그들에게 복이 선포되며, 행해야 할 새로운 질서가 제시된다(6:20-49).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에 무리와 구별되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차원에서 예수의 가족으로 편입된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하시는 종말의 구원 사역에 일꾼으로, 곧 귀신을 제어하며 병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받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는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며, 세상에 생명을 나누어줄 넉넉함을 지니고 있다(9:10-17). 예수가 부르실 때 거부할 명분은 없다. 그보다 다급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9:57-62). 2)하나님과의 친밀감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익히는 제자들은 하나님과의 친밀감 역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도'다. 예수는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신다(6:12; 9:29; 10-17-21; 22:39-46; 23:34,46).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제자들을 초대하시려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11:1-3)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대우 하시는지 잘 보여준다. 제자들은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또 하나의 비유는 '과부와 재판장 비유'(18:1-8)다. 예수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끈질긴 간청보다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관계에 있다. 3) 그 길: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제자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야 한다. 예수가 걸으시는 '그 길'은 부와 권력을 거머쥘 성공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순종의 길이다. 그 길은 좁은 문 넘어로 난 고난의 길이요(13:24), 낮아지는 길이다(14:11). 핍박이 두려움을 몰고 오더라도 끝까지 견뎌야 한다(21:19). 제자들은 세상 핍박자가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12:5). 스승 예수처럼 제자들의 체포와 감금과 핍박은 불가피하다. 그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21:11-19). 그러므로 '그 길'을 걷는 제자의 태도는 담대함이다. '그 길' 끝에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것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처럼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길(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의 시작이 될 것이다. 4) 종말론적 공동체 종말을 사는 제자들은 깨어 있어야 하며 예수의 다시 오심을 신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담대히 주어진 책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청지기적 제자도를 깊이 새겨야 한다('열므나 비유' 19장 '포도원 농부 비유' 20장 '마지막 때' 21:5-36). 5) 가난한 자를 위하여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서' 라고 불릴 정도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관심이 지대하다. 마리아의 찬가에는 예수가 가져오실 구원의 의미가 녹아있다. 어린아이, 세리와 죄인, 여자, 과부, 연약한 자, 사마리아인 등이 하나님의 위로와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복음을 환영한다.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적극 응한다(14:12,13). 반면 교만하고 권세 있고 부유한 자들은 구원의 초청을 거부한다. 예수가 가져오시는 하나님나라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위치는 뒤바뀐다(14:7-11).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교만하고 부에 중독된 자들에게는 '화'를 선포하신다. 하나님 나라와 구원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의 삶 속에 들어오셨던 것처럼, 제자들 역시 그곳으로 보냄을 받는다.